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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완전한 열반, 닙바나 빠리닙바나, 열반 반열반
| 분류 : 교리 | | 2008·11·24 18:10 | HIT : 3,079 | VOTE : 864 |
열반, 완전한 열반, 닙바나(nibbana) 빠리닙바나(parinibbana), 열반 반열반

열반(pali. nibbana ; sk. nirvana)은 잘 알려져 있듯, 글자 그대로 ‘불이 꺼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중적 불교문헌에서 열반[nibbana : 涅槃]은 이 생에서의 열반을 의미하고, 완전한 열반[parinibbana : 般涅槃]은 임종시에 도달하는 열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열반에 대한 적용은 잘못된 것이다. 토마스(E.J. Thomas)에 의하면, 빠알리어에서 ‘완전한’을 의미하는 빠리(pari)라는 말은 단어가 상태표현에서 상태획득으로 변화할 때에 덧붙여진다. 그렇다면, 열반은 해탈의 상태이고 완전한 열반은 해탈상태의 획득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제도 이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동사인 ‘열반에 든다(nibbayati)'와 ’완전한 열반에 든다(parinibbayati)'도 실제로 의미상 구별이 없이 해탈의 획득행위에 쓰인다. 명사인 열반과 완전한 열반도 모두 완전한 깨달음을 통한 궁극적 해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동시에 모두가 육체적인 몸의 파괴를 통한 조건지어진 존재로부터의 궁극적 해탈에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말이 수행승이 살아있는 동안의 해탈에 적용될(12:51; 22:54; 35:31)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아라한의 죽음에도 적용된다. (6:15; 47:13)

완료수동분사형인 닙부따(nibbuta)와 빠리닙부따(parinibbuta)는 명사들 닙바나(nibbana)와 빠리닙바나(parinibbana)와는 다른 어원을 가진다. 전자는 니르-브리(nir-√vr '덮다')에서 후자는 니르-바(nir-√va '불다‘)에서 유래했다. 전자의 분사에 고유한 명사형은 닙부띠(nibbuti)이다. 이 입부띠는 때때로 닙바나와 동의어로 쓰이지만, 완전한 고요, 적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빠리닙부띠(parinibbuti)는 니까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에 이미 두 동사가 융합되어 빠리닙부따가 완전한 열반에 든 자를 지시하는데 사용하는 형용사로 쓰였다. 동사처럼 분사형은 살아있는 부처님과 아라한(8:2) 뿐만 아니라 사멸한 부처님이나 아라한(4:24)의 수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수동분사형인 빠리닙부따는 시에서는 유독 살아있는 아라한과 관련해서 쓰이고, 산문에서는 사멸한 아라한에 한정된다.

경전상 사용법으로 보면, 명사형인 빠리닙바나는 아라한과 부처님의 사멸을 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후의 열반’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이미 살아서 열반을 얻은 자가 사멸하는 사건을 말한다.

경전상에는 두 가지 열반, 즉 ‘잔여가 있는 열반(有餘依涅槃 : saupadisesanibbana)'와 ‘잔여가 없는 열반(無餘依涅槃 : anupadisesanibbana)'이 있다. 요기서 잔여란 갈애와 업에 의해서 생겨난 다섯 가지 존재의 자발의 복합체를 말한다.(Itv. 38-39) 전자는 살아있는 동안 아라한이 획득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뜻하고, 후자는 아라한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의 남김없는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양자는 이미 자아에 취착된 유위법적인 세속적 죽음을 완전히 초월해서 불사(不死 : amata)라고 불리며, 아라한은 이미 자아에 취착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五取蘊)의 짐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ohitabharo)에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애초에 적용되지 않는다.
동일한 완전한 소멸임에도 차이가 나는 것은 잔여가 있는 열반의 경우에는 ‘마치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돌리고 있던 물레에서 손을 떼어버려도 얼마간은 계속 회전하는 것처럼 열반을 얻은 성인도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된 얼마 동은안 삶을 계속하면서 업에 대한 고락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업에 의해서 결정된 삶이 바로 경전에 나와 있는 아직 남아 있는 다섯 가지 감관에 의한 고락의 체험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삶의 죽음과 더불어 업의 잔여물인 다섯 가지 감관마저 사라져버릴 때 잔여가 없는 열반에 이른다. 이러한 두 가지 열반의 세계를 주석서는 각각 아라한의 경지를 얻을 때의 ‘번뇌의 완전한 소멸(kilesaparinibbana)’과 아라한이 목숨을 내려놓을 때의 존재의 다발의 활동의 소멸을 의미하는 ‘존재의 다발의 완전한 소멸(khandhaparinibbana)로 구별하면서, 열반인 닙바나(nibbana)와 ’완전한 소멸‘ 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는 빠리닙바나(parinibbana)를 상호교류 가능하고 동의어로서 본다.

그러나 경전상에서 사용방식은 위 두 종류의 빠리닙바나는 닙바나의 세계에 접근하는 사건으로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빠리닙바나는 소멸하는 행위이고 닙바나는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닙바나는 한역을 통해 열반으로 잘 알려진 우리말이므로 그리고 해석학적 관점에서 많은 다양성을 지닌 고유한 언어임으로 역자는 열반 이외의 다른 번역을 취하지 않는다. 빠리닙바나에 대해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면 비구 보디가 번역한 것처럼 ‘궁극적 열반’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리말의 어감 상 어려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역자는 빠리닙바나를 그냥 ‘완전한 열반’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동사인 빠리닙바야띠(parinibbayati)는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고 번역한다. 그 행위자 명사인 빠리닙바인(parinibbayin)은 ‘완전한 열반에 든 자’라고 번역하고, 완료수동분사인 닙부따(nibbuta)는 열반과 관계되기도 하고 관계되지 않기도 - 빠리닙바야띠와 빠리닙부따가 <맛지마니까야>(MN.Ⅰ. 446)에서는 단지 말의 훈련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 하기 때문에 ‘열반에 든’이나 ‘적멸에 든’으로, 빠리닙부따(parinibbuta)는 ‘완전한 열반에 든’이나 ‘완전히 적멸에 든’이라고 번역한다.  <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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